2019.03.13 03:48
본고는 제 100주년 삼일절 기념식에서 25대 로드아이랜드 한인회장이셨던 이길자 박사님의 강연 내용입니다. 여성 독립 운동가 이길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올해는 1919년 동경의
2-8 독립선언,
3-1 만세운동, 4월 11일 상해임시정부 수립 100년되는 해입니다.
이같이 뜻 깊은
100주년 기념식에 서게 되었음을 매우 영광으로 생각 합니다. 저의 할머님께서 독립 유공자이란 사실을 알게 된 이재영 회장님이 이번
100주년 3-1절 기념식에서 내 할머님에 관한 이야기를 해달라는 부탁을 해 왔을 때 저는 좀 주저했었습니다. 100주년?
그 중요한 기념식에?
할머니 이야기를?
그리고 몇 번 사양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생각해보니 제가 이자리에 서도 좋을 중요한 이유와 또 사명감 까지도 느꼈습니다.
RI한인회 역사
44년 동안 매년 거행하는 두번의 기념식,
삼일절과 광복절,
모두하면 여든 여덟번의 기념식 행사에서 저는 처음으로 초청된 여성으로 약
1.2% 기회에 해당되고 또 그것도 나 때문이 아니라 여성 독립 유공자이신 내 할머님 때문에 주어진 자리라 생각할 때,
여성유공자는 단지
226명 뿐으로 전체
12358명에 대비해서 그것도
1.83%라는 희귀성,
minority라고 생각할 때 내가 이기회를 포기나 사양한다는 것이 목숨까지 걸고 민족과 조국을 구하기 위해 희생으로 투쟁하신 여성 선열님들께 죄송함이 느껴졌습니다.
여성교육과 참여가 극히 제한되었던 그 당시 사회상을 고려할 때 여성독립유공자의 공적이 더욱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며 그 동안 남성위주로 추진되어온 독립유공자 선양사업이 상대적으로 소외된 여성독립 운동가를 재조명하며 기념하려는 조력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국가보훈처는
2019년 새해 첫날을 유관순의 날로 선포하였고 여성 독립유공자 인명사전도 편찬하는 등의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이번에 한국 충북 청주에서는 여성독립운동가 전시 시설을 전국 최초로 조성하여 그 지역
7명의 여성독립유공자의 흉상을 제작하고 오는
8-15광복 74주년을 기해 일반에 공개한다고 합니다. 1919년 3-1운동은 꽃다운 나이
18세에 순국한 유관순으로 상징되는 여성들이 함께했기에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남녀가 동등하게 참여하는 형태가 되었고 그로 인해
1919년 4월11일 상해에 건국된 임시정부의 초기 헌장은 단지
10개 조항에 불과했는데 그 안에 남녀의 평등과자유 또 참정권까지 포함되어 있습니다.
참고로 미국은 올해가 여성참정권 수정헌법 제
19조가 부여된 지
100년이되는 해인데 그것도 그전
200여년을 투쟁해서 얻어진 결과라고 합니다. 독립 유공자이며 교육자이신 저의 할머님 성함은 김영순입니다. 정신 여학교를 김마리아보다 1년 후배로 졸업하시고 모교에서 교사와 사감으로 일하시며 학생들에게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한 애국 독립 정신을 고취시키며 독립운동,
만세 운동,
신사 참배 거부등의 항일운동을 폈습니다. 정신 여학교는 1886년 미 북장로 선교사에 의해 세워진 미션 스쿨로 이화 여학교와 더불어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여학교로서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의 산실이어서 많은 고난의 역사를 겼었습니다.
1919년에 지하조직 애국 부인회장을 비록 여러 임원,
회원들이 교사였고 그 본부가 정신여학교안에 설치되었기 때문에 집중적으로 탄압의 표적이 되었고 1939년에는 국어 말살 정책,
신사참배 거부로 한때 패교까지 당한 역사가 있습니다.
저희 할머님은 1919년 3월에 협성 애국부인회를 함께 결성하여 독립운동 항쟁을 전국으로 펼쳤습니다.
1919년 9월 대한민국 애국부인회에서는 회장 김마리아일 때 서기로 일하며 회원 100명이상을 모집하여 전국에 지부를 두고 또 6000원 독립자금을 모금하여 임시 정부에 송금하였습니다.
이 회는 임시정부의 국내 연통부 역할과 대한 적십자회 대한 총지부의 활동을 대행하였습니다.
191년 11월에 체포되어 2년 형언도 받아 옥고를 치르며 많은 수난을 받았습니다.
출옥 후 1927년 근우회의 창립에 공헌하였고 창립 후 교양부를 맡아 여성의 교육,
지위향상과 항일운동에 힘썼습니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가리어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하였습니다. 김영순 할머님은 94세까지 사시면서